종교

[스크랩] [출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6) 한 여자가 출가하던 날..

걍 처음처럼 2006. 5. 7. 10:32

(6) 한 여자가 출가하던 날..

 

 

이번 글을 저는 시나리오 형식으로 썼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적으면서 상황을 다소 정돈하고 세밀한 묘사를 양념삼아 약간 곁들인 논픽션입니다. 따라서 인위적인 '위기'나 '갈등'이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문학적인' 분들의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출가를 원하는 사람의 경우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절집 분위기 때문에 두려워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불교학생회와 불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숱하게 절에 다녔지만, 정작 출가를 결심하고 길을 떠나려니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은 비단 저만 그런 게 아닐 것입니다.

이 글의 세밀한 묘사는, 출가를 꿈꾸지만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의도적으로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산속 암자로 찾아온 한 여자가 비구니 도량으로 보내져 행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어서 분명히 '한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대흥사나 백양사, 해인사로 출가하는 남자는 이 글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숱하게 많은 경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저 이런 경우도 있다고. 그러니 재미삼아 읽어보자고 생각하시면 글을 올리는 저나 읽으시는 여러분이나 별로 부담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흥사 산사이야기에 올리는 저의 글이 반복되는 비슷한 유형이기 때문에 다소 지루해 하실 것 같아 팬 서비스(?) 차원에서 변화를 준 것이기도 하구요.^^ 처음 시도하는 글의 형식이니만큼 서툴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글을 변변하게 봐주신 백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의 배경음악은 이오시프 꼬브존이 노래한 '백학'입니다. 링크 음악을 보내주신 흰감자꽃님께도 감사드립니다.




s#1. 관음암 차실


2003년 2월 6일 관음암. 40대 중반의 승려가 차실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그의 법명은 한북. 백양사 권속으로 대흥사 산내암자에 살고 있는 그는 172Cm의 키에 안경을 끼고 있고 마르지도 통통하지도 않는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말이나 표정이 없을 때는 차갑게 느껴지는데, 그러한 자신의 결점을 아는 그는 늘 부드러운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에게는 얼마전부터 역사책 모으는 취미가 새로 생겼다. 오직 한국사에 국한하며 조선 시대의 불교와 관련있는 책을 선호한다. 그밖에 14년째 사진 찍는 흉내를 내고 있긴 한데 필름만 잔뜩 소비할 뿐 브레쏭 같은 작품을 남기지도 못하고 있다.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틈만 나면 오디오를 켜는 ‘음악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대흥사 교무를 보고 있지만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다. 천성이 무척 게을러 바로 코앞에 있는 두륜산 정상에조차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으면서도 도반 법인 스님이 그의 게으름을 힐난하기라도 하면 언젠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먹이며 산이 낮기 때문에 등산하는 맛이 안 나서 가지 않는다는 둥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가 관음암에 머물고 있을 때는 손님을 많이 치른다. 지나가던 등산객이나 방문객을 차실로 불러 차 대접하며 대화하기를 즐기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주로 듣고 배움으로써 무식함을 감추고 있다.


가로 5.3미터 세로 4.7미터의 방에는 마루쪽에 두 개의 한지를 바른 여닫이 문이 있고, 두 문 사이 벽에 오디오와 CD가 다소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은색 앰프 위에는 검은색 CD 플레이어가 올려져 있고 두 문 옆 코너에 있는 낡은 스피커에서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다소 큰 소리로 흐르고 있다.


오른쪽 스피커 위에는 지름 13cm, 높이 22cm가량의 곧게 뻗은 도자기가 놓여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지와 같은 재질인 이 도자기의 안쪽 바닥에는 3cm가량 모래가 채워져 있고, 향기를 잔뜩 머금은 연기를 향은 가만히 피워내고 있다.


오디오 건너편 방바닥 중앙에 자리잡은 커다란 차상은 자연스런 선이 살아있는 고목이다. 그 위에는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다구와 중국다구 그리고 산속 암자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커피도구가 놓여 있다.


그 옆 벽쪽에는 3단으로 된 자그마한 장식장이 있는데, 커피잔과 녹차잔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황토색 다포가 덮여 있다. 반대편 차상 옆에는 물 끓이는 기구가 세 개 놓여 있다. 차상 앞 벽쪽으로 회색 방석을 깔고 앉은 그의 다리 위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으나 그는 벽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음악에 심취한 듯 박자에 맞춰 머리를 가볍게 앞뒤로 흔든다.



s#2. 관음암 뜨락


그다지 넓지 않은 터를 차지하고 앉은 암자, 관음암. 해남 대흥사의 산내암자 가운데 하나로 대흥사에서 송신탑 방향으로 1.5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법당 마주보이는 곳에 두륜봉이 펼쳐져 있어 두륜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에 사는 대각심이라는 노보살님이 평생동안 모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1977년 복원한 이 암자에는 법당과 산신각을 포함, 모두 다섯 동의 건물이 있다. 예전 이름은 명적암.


중앙에 위치한 ‘관음전’이라는 편액이 달린 법당을 마주하고 그 오른편으로는 시멘트 기와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외부에는 은빛 알미늄 샷시가 설치되어 있어 보통 느끼는 절집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 이질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건물은 현재 차실로 쓰이며, 경우에 따라 음악감상실로, 손님이 오면 객실로 쓰여지고 있다.


건너편 건물은 흔히 보는 절집 건물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 위 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눈이 남아 있고 말라죽은 풀이 곳곳에 보인다.


그 건물 아래 음지에도 눈이 쌓여 있는데, 20대 초반의 애기 보살이 발자국이 없는 곳을 골라 다니며 눈을 밟고 있다. 자연스런 커트머리를 한 애기 보살은 등에 배낭을 메고 있는데, 불룩한 걸로 보아 무거워 보인다.


겨울 햇살이 법당 앞에 세워진 자그마한 5층탑 위에 부서지고 밭에 버려진 과일껍질과 음식찌꺼기를 먹기 위해 가끔씩 산새가 나타나 정적을 깬다. 뜨락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서 자라고 있는 오죽(烏竹)은 실낱같은 바람에 하늘거린다.



s#3. 차실


합창 교향곡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CD를 앙드레 가뇽 연주 음반 'monologue'로 바꾼 뒤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다가 눈을 밟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오후 2시의 햇살은 법당 지붕을 비추고 연꽃 모양의 그림자를 황금빛 잔디위에 그린다. 5층탑과 나란히 서 있는 석등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짝을 부른다. 유리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 새가 포르르르! 하늘로 튀어 오르고 애기 보살의 시선이 시멘트 기와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건물로 향한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씽긋 눈웃음을 보낸다. 애기 보살도 미소로 화답한다.


한북,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에게 차를 권할 생각으로 말을 건넨다. 인도인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거리며 미소 띤 얼굴로 차를 권하는 한북.


한북 : 차 한 잔 어때요?

애기 보살 : 예, 좋아요.

한북 : 들어오세요.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시원스레 대답하고 초록색 지붕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애기 보살이 걸어오는 사이 그는 방석 하나를 차상 건너편에 갖다놓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포트 스위치를 올리고, 다구를 덮은 다포를 벗겨 각이 생기도록 반듯하게 접는다. 차실로 들어온 애기 보살, 방을 휙 둘러보며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말없이 팔을 뻗어 애기 보살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한다.


키 155정도에 다소 통통한 편으로 얼굴에 화장끼가 전혀 없이 순수한 모습.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앳되고 귀여운 얼굴 스타일의 애기 보살.


한북 : (웃음 띤 얼굴로) 어서 오세요. 관음암엔 처음인가요?

애기 보살 : (자리에 앉으며) 예.

한북 : 혼자요?

애기 보살 : 예.

한북 : 차 가지고 왔어요?

애기 보살 : 아뇨, 걸어왔어요.

한북 : 오호, 예쁜 아가씨가 혼자 이 깊은 산속에 나타나다니… 해남엔 언제 왔소?

애기 보살 : 오늘요.


한북, 끓는 물을 부어 다기를 헹군 뒤 차관에 차를 넣고 우리며 간간이 애기 보살에게 눈길을 준다.


한북 : 그래, 여행인가요?

애기 보살 : …….

한북 : 여행이 아니면 누가 꿈에 나타나서 관음암 가라고 계시라도 보냈나요?

애기 보살 : …….


한북, 다구를 다루며 다소 장난끼가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노란색의 차를 유리 숙우에 거름망을 댄 채 따라 내고 숙우를 투명한 유리 찻잔에 옮겨 따른 뒤 애기 보살에게 내민다. 잠깐 동안의 침묵.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선율이 그 공간을 메운다.

잠시 머뭇거리던 애기 보살은 결심한 듯 입을 뗀다.


애기 보살 : 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한북 : …….

애기 보살 : 저… 출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좀… 가르쳐 주세요.

한북 : 음….


한북, 찻잔을 내려놓고 애기 보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구로 옮기고 차를 우려내면서 잠시 침묵한다. 뜨거운 차를 마시는 두 사람.

그는 차를 우려내면서도 침묵을 지킨다. 그 침묵사이를 파고드는 피아노 선율.


한북 : 출가라… 쉬운 일이 아닌데…. 언제부터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했나요?

애기 보살 : 어릴 때부터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한북 :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애기 보살 : 왜 그런지 저도 모르는데요, 아무튼 스님이 되고 싶었어요.


한북 : 스님 노릇이 보통 힘든 게 아닌데…, 그거 아나요?

애기 보살 : TV를 보면서 무척 힘든 길이라는 걸 느꼈는데, 잘은 몰라요.

한북 : 부모님은 계신가요?

애기 보살 :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이혼하셨어요. 얼마 전까지 아버지랑 살다가 지금은 어머니와 연락을 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재혼하셨어요.


한북 : 출가한다면 부모님이 허락하실까요?

애기 보살 : 옛날부터 출가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얼마 전에는 친구가 저보고 절에 들어간다더니 안 가냐고 묻던데요. 엄마는 출가하는 거 반대 안 하세요.


애기 보살, 무거운 분위기가 버거운 듯 애써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경쾌하게 이끌어 가는 한북. 문답식의 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한북 : 나이는 몇인가요?

애기 보살 : 스물 하나예요.

한북 : 대학은?

애기 보살 : 안 나왔어요. 철학과에 응시했는데 떨어져서 못 갔어요.

한북 : (웃으며) 스님이 되면 대학도 가야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자신 있어요?

애기 보살 : (따라 웃으며) 공부 많이 하고 싶어요.


한북 : 그래요? 행자생활을 최소한 6개월 동안 하면서 천수경 같은 의식들을 모두 외워야 하는데?

애기 보살 : 외우는 건 자신 있어요.

한북 : 사미계 받고 나면 강원에 가서 한문으로 된 책 4년간 공부해야 되는데?

애기 보살 : 배우죠, 뭐.

한북 : 강원 졸업하고 나면 승가대나 동국대로 가서 다시 4년 공부해야 되는데, 할 수 있어요?

애기 보살 : 공부하면 좋죠, 뭐.

한북 : 요즘 스님들은 대학원에 많이 가는데?

애기 보살 : 보내주면 가죠, 뭐.

한북 : 그 다음에 학문을 계속 하든지, 아니면 선방 가든지, 기도하든지, 주지 같은 소임 살든지 해야 하는데, 어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애기 보살 :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모두 할 수 있어요.


한북 : 으흠, 그래요? 스님이 되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애기 보살 : 책을 많이 읽고 글을…, 글을 쓰고 싶어요.

한북 : 책은 얼마나 읽나요?

애기 보살 : 한 달에 보통 스무 권 가량 읽어요.

한북 : 그러려면 책값을 많이 주는 스님을 은사로 모셔야 되겠네.


한북과 애기 보살, 마주보며 말없이 웃는다.


애기 보살 : 좋은 스님 소개해줄 수 있으세요?

한북 : 어떤 스님이 좋은 스님인가요? 책 많이 사주는 스님?


한북, 찻잔을 거두어 뜨거운 물로 헹구고 행주로 닦아 자리를 정리한다. 그때 마침 그가 들고 다니는 무선전화기 글자판에 연두빛 불빛이 깜빡거리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는 한북.


한북 : 예, 관음암입니다. 아, 스님이세요? 텔레파시가 통했나보네. 내가 지금 스님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지는 내가 건너가서 전화할게요. 잠깐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 애기 보살을 쳐다보며) 그럼 내가 전화를 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음악 들으면서 기다려요.



s#4. 한북의 방


한북, 차실 건너편 기와집 건물 법당쪽 갓방에 들어선다.

공부방에는 한쪽 면 가득 책이 꽂혀 있다. 서가는 나무토막을 차곡차곡 쌓고 사이사이에 널빤지를 가로질러 책을 얹은 조립식 책장이다. 그 맞은편에는 벽장이 있고 문과 벽장 사이에 같은 형식의 서가를 만들어 책을 꽂아두었다.

법당 쪽으로 난 창은 통유리로 되어 있는데 흰색 얇은 천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커튼을 통해 들어온 부드러운 빛이 방을 밝히고 있다. 건너편에는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지를 바른 여닫이 문이 있는데, 안쪽으로 금속성 그물이 쳐져 있다.


그 문쪽 벽에 길이 150센티미터의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 있고 ㄱ자 모양으로 같은 크기의 테이블이 하나 더 놓여 있다. 벽쪽 테이블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프린터가 놓여 있다. 프린터 옆 책꽂이에는 CD가 200~300장 꽂혀 있다.

한북, 전화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


한북 : 아, 한북입니다.

보리 : 잘 지내세요?

한북 : 나야 늘 잘 지내죠. 스님은 기도 잘 돼요?

보리 : 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느라고 하긴 해요.

한북 : 상좌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더니 어때요, 영험 있나요?

보리 : 아직은 없어요. 근데 나한테 할 말이 뭔데요?


한북 : 여기 출가하겠다는 애기 보살이 한 명 와 있어요.

보리 : (깜짝 놀라며) 정말요? (풀죽은 목소리로) 근데, 내 기도가 시원찮았나… 왜 그리로 갔지…?

한북 : (나무라듯 진지하게 농담을 던진다) 그건 보리 스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오. 아니면 내가 더 영험이 있던지.

보리 : 스님이 영험이 있었으면 남자가 와서 스님 상좌하렵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한북 : 하하하! 하긴 그렇네요.


보리 :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한북 : 좀 전에 배낭 메고 애기 보살이 한 명 나타났는데 출가하고 싶대요.

보리 : 몇 살이래요?

한북 : 스물 하나.

보리 : 이야, 좋네! 그 애기 보살 나한테 보낼 거죠?

한북 : 글쎄… 조건이 맞으면 보내드리지요.

보리 : 조건? 어떤 조건인데요?

한북 : 글을 쓰고 싶어한대요. 책도 많이 읽고 싶고.

보리 : 공부야 당연히 시켜야죠. 그런 조건이라면 내가 땡빚을 내더라도 공부 시킬 게요.

한북 : 그럼 어떻게 보내지요?

보리 : 스님은 서울에 볼일 없어요? 어른 스님한테 세배드려야 한다면서요.

한북 : 여기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못 움직이는데….


보리 : 그럼, 내가 내일 내려갈게요.

한북 : 내일 몇 시요?

보리 : 오늘 밤 12시쯤에 출발하면 아침 6시쯤 거기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북 : 밤새 내려오려고요? 그러면 피곤할 텐데.

보리 : 피곤한 게 문제예요? 상좌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부처님이 보내신 건데…. 그리고 내일 오후에 재일교포 천도재가 있기 때문에 그걸 지내고 가면 너무 늦을 것 같아요.

한북 : 정 그렇다면 조심해서 오세요.

보리 : 예, 내일 아침에 봬요. 근데, 스님! 그 아가씨 이뻐요?

한북 : (장난스럽게 소리치며) 어허, 이 할매가 와 이라노! 인물로 중노릇하능교!



s#5. 차실


애기 보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지 그 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다. 그때 문을 여는 소리가 나면서 한북이 차실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한북 : 내 도반 중에 보리라는 비구니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이 내일 아침에 오기로 했어요. 그 스님 따라 가면 돼요.

애기 보살 : 가면 곧바로 머리를 깎는가요?

한북 : 바로 깎는 경우도 있고, 몇 달 뒤에 깎는 경우도 있어요.

애기 보살 : 왜 그렇죠?

한북 : 바로 깎는 건 신분이 확실한 경우고, 뒤에 깎는 건 이유가 있어요.

애기 보살 : 무슨 이윤가요?

한북 : 얘기를 하기 좀 뭣하지만… 음… 여자의 경우에는 임신했는지 모르니까 시간을 좀 두고 살펴보는 거예요.


애기 보살, 얼굴이 붉어지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한북 : 오늘은 이 방에서 쉬어요. 마음 편하게. 음악을 들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아요. 그럼 있다가 공양하고 저녁예불 때 봅시다.

애기 보살 : (일어나 합장하며) 예, 감사합니다. 스님.



s#6. 관음전


한북, 목탁을 치며 저녁예불을 올린다. 그 옆에 관음암에 사는 무량심 보살님과 애기 보살이 함께 목탁소리에 맞춰 절을 한다. 한북, 저녁예불을 마치고 그녀를 쳐다보며 말한다.


한북 : 애기 보살은 들어가 쉬어요. 기도는 함께 하지 않아도 돼요.


한북과 무량심 보살, 천수경 독경에 이어 정근을 한다.



s#7. 한북의 방


전화벨이 울리며 새벽의 적막을 깬다. 새벽예불과 기도를 마친 뒤 책을 읽고 있다가 전화를 받는 한북.


한북 : 예. 관음암입니다.

보리 : 스님, 전데요. 지금 매표소 통과하고 있어요.

한북 : 눈 때문에 승용차는 올라올 수가 없거든요. 내가 지금 바로 내려갈 게요. 일주문 근처 주차장에서 만나요.


전화를 끊은 한북, 자동차 열쇠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문을 나선다. 문밖에 있는 랜턴을 집어든다. 랜턴 스위치를 켜고 계단을 비추며 내려간다.

차에 키를 꽂으며 고개를 틀어 잠시 동쪽 하늘을 바라본다. 동쪽 하늘에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s#8. 뜨락


2월 7일 오전 6시경. 보리 스님이 한북이 비춰주는 불빛을 따라 계단을 올라온다. 마당에 올라서면서 법당을 향해 반배 올리고 뒤 돌아서서 두륜봉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키 160 정도의 보리 스님은 40대 후반으로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옷매무새가 깨끗하고 반듯해서 빈틈을 찾기 어렵다. 손에는 회색 천으로 만든 자그마한 손가방을 들고 있고, 바지런한 비구니 스님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삭발을 자주하는지 언제나 반짝거리는 머리를 보여주고 있다. 목에 회색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보리.


보리 : 절 좋네요. 전망도 좋고.

한북 : (웃으며) 스님 절이랑 바꿀까요?

보리 : (따라 웃으며) 좋아요. 근데 애기 보살은 어딨어요?

한북 : (몸을 뒤로 돌리며) 저 집에 있어요. 불이 켜진 걸 보니까 일어났나보네. 푹 자라고 새벽 예불 때도 안 깨웠는데….


보리가 법당에 들어가 참배하는 사이 그는 차실 건물의 바깥에서 유리문을 열고 방 안을 향해 다소 큰소리로 묻는다.


한북 : 일어났나요?

애기 보살 : 예.


방문을 열고 애기 보살이 마루로 나오며 합장 인사를 한다.


애기 보살 : 스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한북 : 예, 방은 따뜻하던가요?

애기 보살 : 따뜻하게 잘 잤어요.

한북 : 스님 오셨는데, 들어가도 되나요?

애기 보살 : 예. 들어오세요.



s#9. 차실


보리, 방 안으로 들어오며 애기 보살을 한 번 흘깃 쳐다본다. 애기 보살, 보리 스님에게 합장한 채 허리를 숙이고 보리도 합장으로 인사를 받는다. 한북과 보리, 마주보며 큰절로 인사를 나눈다.


보리 : 스님, 세뱃돈 주세요.

한북 : 이 시님 봐. 요즘은 있는 사람이 더 하다니까. 큰 절 주지스님이 봉투를 내놓으면서 세배를 해야지!

보리 : 그건 그거고 세뱃돈은 줘야죠.

한북 : 세뱃돈은 무슨… 맞절하는 사이에… 공양이나 하러 갑시다.



s#10. 공양간


현대식으로 된 부엌에 무량심 보살님이 상을 두 개 차리고 있다. 한북과 보리가 공양간으로 들어서고 애기 보살이 그 뒤를 따른다. 무량심 보살님이 합장하고 인사하자 보리 스님도 합장한다.

상 하나에 한북이 앉고 다른 상에 보리와 애기 보살이 앉는다. 합장 인사 후 공양을 시작한다.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s#11. 차실


한북, 보리와 함께 차실로 들어선다. 방에 들어온 한북은 스피커에 얹혀있는 향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불꽃을 끄지 않고 그대로 도자기 향로에 꽂아두자 잠시후 불꽃이 저절로 꺼지면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향기가 퍼진다.

한북, 오디오를 켜면서 혼자말처럼 이야기 한다.


한북 : 아침에는 어떤 음악이 좋을까? 모차르트가 좋겠지…. 클라리넷 협주곡은 석양에 들으면 좋고… 경쾌한 게 좋을 텐데…. 아냐. 얘길 해야 되니까 바흐의 첼로가 좋겠네.


한북, 로스트로 포비치가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 CD를 CDP에 올리고 소리를 올린다. 옆에 서서 지켜보던 보리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고 포트 스위치를 누른다. 다구를 챙기면서 보리에게 말한다.


한북 : 내 살림살이가 이래요.

보리 : 좋네요. 좋은 절에 좋은 음악에… 나는 언제나 이런 복을 누리고 살까? 비구 스님들은 복도 많아….

한북 : 복이 많고 적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취향이죠. 스님은 맘만 먹으면 나보다 더 잘 갖출 수 있잖아요.

보리 : 난 음악이라도 듣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이젠 절도 하나 생겼으니까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할텐데.


한북 : 그래요, 그 새 공부한다고 수고했어요. 늙어서 고생했구먼.

보리 : 호호호! 나를 아주 노인네 취급하네.

한북 : 하하! 남들이 들으면 아닌 줄 알겠네… 피곤하죠? 먼 길 오시느라고….

보리 : 이 정도 쯤이야 괜찮아요.

한북 : 아직 청춘이네요.


설거지를 마친 애기 보살이 차실로 들어와 보리 옆에 앉는다. 보리, 애기 보살을 유심히 쳐다보고 애기 보살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첼로 소리 속으로 침묵이 녹아든다.


한북 : 보리 스님은 오룡차를 좋아하지… 그걸로 마실까요?

보리 : 스님이 좋을 대로 하세요.


한북, 뜨거운 물을 유리 차관에 부어 헹궈낸 뒤 찻잔을 다시 헹군다. 유리 차관에 차 숟가락으로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낸다. 유리 숙우에 든 차를 찻잔에 담아 두 사람에게 건넨다. 보리와 애기 보살, 차를 마시며 조심스레 서로를 살핀다.


한북 : (애기 보살에게) 여기 계신 스님은 보리 스님인데, 나랑 중앙승가대학을 같이 다녔어요. 얼마 전에 유아교육학과를 또 마쳤어요. 의지의 한국인이에요. 지방에 살다가 얼마 전에 서울 근교 절을 맡아 살고 계시죠. (보리 스님에게) 이쪽은 설명 안 해도 되죠?


한북, 애기 보살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한다.


한북 : 스님이 마음에 안 들거나 혼내면 나한테 고자질해요. 내가 해결해 줄게. 책을 안 사준다든지, 아픈데 병원에 안 데리고 가도 전화해요. 내가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다른 스님을 소개해 줄게.


애기 보살, 명함을 받아들며 방긋 웃는다. 보리,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보리 : 든든한 빽이 있어서 좋겠네.

애기 보살 : (한북을 향해 밝은 목소리로) 스님, 감사합니다.


보리와 애기 보살의 대화가 이어진다. 첼로 선율에 춤추듯 향연기가 하늘거린다.



s#12. 관음암 뜨락


보리와 애기 보살, 법당에 가서 인사하고 나오는 사이 한북은 두륜봉을 바라보고 있다. 한북의 옆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


보리 : 며칠 뒤에 삭발할 생각이에요. 와서 머리 좀 깎아주세요. 이름도 지어주고요.

한북 : 머리 깎는 것도, 이름 짓는 것도 은사가 해야죠.

보리 : 스님이 출가인연을 맺어줬으니 스승이잖아요. 그렇게 해 주세요.

한북 : 생각해 볼게요.


세 명이 함께 계단을 내려온다. 동쪽 하늘 구름 틈으로 가느다란 햇살이 쏟아진다. 새소리가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s#13. 한북의 방


한북, 전화를 누른다. 신호음이 울리고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는다.


한북 : 여보세요. 조계종 총무원 승적과죠? 나는 대흥사 교무 한북인데요. 문의할 게 있어요. 여의라고 하는 스님이 조계종에 몇 분 계신가요? 아, 그거요. 행자 이름을 짓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가 해서요. (잠시 후) 예, 한 분요. 비구니 스님이라구요. 어디 계시는 분이신가요? 예,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s#14. 보리의 절


2월 13일 아침.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경기도에 있는 절. 야트막한 산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포근한 도량. 밤에 조금 내린 눈으로 인해 나뭇가지가 희끗희끗한 게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도량 마당에는 눈이 쌓여 있다고 하긴 그렇고, 그렇다고 눈이 없다고 하기에도 그럴 만큼 어중간하게 쌓여 있다.

겨울바람에 대웅전 추녀 끝 풍경이 무심히 뎅뎅거린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다소 을씨년스런 분위기. 날씨 탓인지 도량 가운데 서 있는 3층 석탑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대웅전을 마주보고 왼쪽켠에 단청하지 않은 목조 건물이 요사채로 쓰이는 건물이다.

가운데 큰 방이 있고 양쪽으로 방과 부엌이 있다.

큰 방 가운데 가로세로 2미터 가량의 깔개가 깔려 있고 그 바깥쪽에 세숫대와 비누가 삭발기와 함께 놓여 있다.

책상위에 얹혀있는 향로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하느적하느적 피어오르다가 공기의 무게에 짓눌려 사르르르 말리더니 어느새 자취도 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향기만 남는다.

한북과 보리, 가사 장삼을 수한 채 1미터 가량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아 있다. 잠시 후 애기 보살이 간편한 복장으로 나타난다.


보리 : 스님께 삼배 올려라.


애기 보살은 서툰 몸짓으로 절을 하고, 한북은 합장하고 절을 받는다.


한북 : 은사 스님께도 절을 올리고 앉아라.


애기 보살, 방향을 틀어 보리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고 보리는 합장한 채 절을 받는다. 애기 보살이 방향을 틀어 그를 향해 꿇어앉는다.


한북 : 우리 절집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른다.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인데, 중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이 무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으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러한 윤회의 원인이 바로 무명이라는 것이다.

무명을 제거하면 중생의 본래 성품인 불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무명을 없애고 부처가 되자는 것이다.


이 무명은 번뇌로 나타나 중생들에게 인지(認知)된다. 그러니까 순간순간 나타나는 번뇌를 그대로 두면 마치 한여름 잡초가 나듯이 금새 무성하게 된다. 농부가 잡초를 제거하는 심정으로 수행자는 이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이 무명은 그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다시 자라게 된다.


애기 보살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한북의 설법을 경청하고 있고, 보리도 잠자코 함께 듣고 있다.


한북 : 우리 불교교단에서는 이 머리카락을 무명에 비유해서 이것을 깎는다. 번뇌가 끊임없이 자라나지만 수행으로 얻은 지혜의 칼로 이를 자르듯이 삭도로써 끊임없이 자라나는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르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자르는 것이다.


한 평생 중노릇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온갖 마구니의 장애가 닥쳐온다. 그때마다 깎은 머리를 만지며 이렇게 생각해라. “나는 중이다. 번뇌를 자르고 지혜를 기른다. 나는 중이다.”

그러면 번뇌가 줄고 마장 또한 줄어들 것이다. 삭발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북의 설법이 끝나자 애기 보살이 꿇어앉은 채 합장하고 반배한다.

보리, 일어나 미리 준비한 커다란 천으로 애기 보살의 목에 감고 집게로 고정시킨다. 애기 보살의 무릎 앞에는 흰 종이가 깔려 있다.

한북, 가사 끝자락을 말아 왼쪽 어깨에 끼우고 가위를 든다. 그리고는 애기 보살의 의사를 묻는다.


한북 : 머리를 깎겠느냐? 지금이라도 깎기 싫으면 말해라.

애기 보살 : …….


한북, 애기 보살의 침묵을 깎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정수리부터 긴 머리를 잘라내 흰 종이 위에 차곡차곡 얹는다. 긴 머리를 잘라내고 짧아진 머리카락을 더 잘라낸다. 애기 보살,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맡기고 있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해 오던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한북, 머리를 대충 깎고 나서 가위를 놓는다. 애기 보살의 머리는 기다란 가위자국으로 인해 밤송이처럼 되어 있다.

보리, 애기 보살의 몸에 두르고 있던 천을 조심스레 걷어내면서 말한다.


보리 : 저 세숫대를 옮겨와서 머리를 적시고 비누를 칠해라.


애기 보살, 보리가 시키는 대로 머리에 비누칠을 한다. 보리, 삭도를 들고 정수리부터 깎기 시작한다. 넓은 방에 벽시계 째깍거리는 소리와 사각사각 머리 깎는 소리만 들린다. 언제부터인지 공양주 보살이 한쪽 켠에 꿇어앉아 합장하고 있다.

한북, 자리에 앉아 삭발하는 모습과 향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번갈아보며 단주를 굴린다.

보리, 삭발을 끝내고 세숫대에 삭도를 담그며 말한다.


보리 : 가서 씻고 오너라.


애기 보살, 살그머니 일어나 조심스레 샤워실로 향한다.

보리는 세숫대를 치우고 공양주 보살은 깔았던 자리를 걷는다.

한북,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계속 단주를 굴리면서.

잠시 후 보리 스님 뒤를 따라 오렌지색 옷을 입은 행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행자는 어색한 듯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있다. 입가에도 어색한 미소가 묻어 있다.


보리 : 스님, 우리 행자 이쁘죠?

한북 : (행자를 쳐다보며) 그래, 생긴 만큼 수행도 잘 해야지.

보리 : 삭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절하고 앉아라. 스님이 설법해 주실 거다.


행자는 절을 하고 한북과 보리는 합장하고 절을 받는다. 절을 마친 행자, 한북을 바라보고 꿇어앉는다.


한북 :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부처님은 잡아함 맹구경(盲龜經)이라는 경전에서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설화를 들어 설법하고 계신다.


망망대해에 눈 먼 거북이가 한 마리 있는데 물 속에 살다가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민다. 물 위에는 구멍이 하나 뚫린 나무가 하나 떠다니는데 백 년에 한 번 물 밖으로 나오는 거북의 머리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부처님은 눈먼 거북이가 나무토막의 구멍을 만나는 것 보다 사람 몸 받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다.


게다가 불법이 있는 세상은 얼마나 만나기 어려운가?

이 우주에는 수천억개의 별들이 있고 그 가운데 우리 인간이 사는 지구처럼 생명체가 사는 별 또한 무수히 많다. 중생이 생로병사를 겪는 세계가 이 지구만은 아닌 것이다. 그 수많은 세계에 사는 중생들의 수는 또한 얼마나 많겠는가? 그 수많은 세계와 중생 가운데 유독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만 불법이 있으니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고 한 것이다.


불법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기나긴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으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행운을 만난 것이다.

부디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우고 이번 생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각오로 열심히 수행해라. 알겠느냐?


행자 : (합장하고 반배하며) 예.

한북 : 너의 이름을 '여의'라고 지었다. 같을 여(如), 뜻 의(意). 부처가 되겠다는 원(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이 너의 뜻대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니 열심히 정진하도록 해라.

행자 : (합장하고 반배하며) 예.

한북 : (앞에 놓여 있는 흰 종이뭉치를 가리키며) 이 종이 속에는 너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다. 이걸 양지바른 곳에다 묻도록 해라. 수행하다가 힘들면 너의 머리카락이 묻힌 곳을 생각해라. 네가 처음으로 삭발하는 오늘을 생각하고 너의 마음을 다잡아라. 그러면 새로운 신심(信心)이 생길 것이다.



s#15. 한북의 차안


한북, 보리와 행자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흰색 코란도 밴. 잠시 차를 예열하는 사이 카오디오 파워 스위치를 누르고 CD를 바꾼다.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며 한북은 차를 출발시킨다. 보리와 행자 합장하고 인사한다. 이오시프 꼬브존이 노래한 '백학'이 커다란 소리로 울려퍼진다.


<백학>

유혈의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

낯선 땅에 쓰러져

백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드네.

저들이 아득한 시간에서 날아와 울부짖는 것은

우리가 자주 슬픔에 겨워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에 젖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피곤에 지친 새들이 떼를 지어

석양의 안개 속을 날아다니네.

저들 무리 속의 작은 틈새는

어쩌면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닐까.

학의 무리처럼 새날이 찾아들면

나도 그들처럼 회색 안개 속을 훨훨 날아보리.

이 땅에 남겨진 우리 모두에게

하늘 아래서 새처럼 울부짖으며.



s#16. 대흥사 숲길


한북의 차가 대흥사 숲길을 달린다. 겨울이어서 찾는 이가 그다지 많지 않는 한적한 길. 늦겨울 앙상한 가지 사이로 봄을 재촉하는 듯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친다. 배경에는 '백학'이 계속 울려퍼진다.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 피골이 상접한 북한 어린이의 모습. 연인이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 사랑스런 눈길을 주고받는 장면.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부부. 시끌벅적한 시장 모습 등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이 대흥사 숲길 사이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숲길이 이어진다.


걸망을 메고 숲길을 걸어 대흥사로 향하는 한 스님의 뒷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나지막한 소리로 나래이션이 흐른다.


NA :

수행자여, 우리의 삶은 결국 전쟁인 것을.

밖으로는 세상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는 번뇌와 싸워야 하는

치열한 전쟁터.

적의 총알이 전우를 죽이기도 하고

때론 내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라.

적의 탄알이 내 심장을 꿰뚫거나

이마를 파고들더라도

달려라. 저 열반의 고지를 향해!



s#17. 관음암 법당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는 뒷모습의 한북. 그는 자신이 은사 인연을 맺어주고 머리를 깎아준 여의 행자가 평생동안 무난하게 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정성껏 절을 올린다. 향로에서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다.


-END-


글 : 한북스님


출처 :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글쓴이 : 윤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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